2022년 6월 18일 토요일

지나간 시간 속에서

때를 따라서 그때 그때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비가 오면 생각나는 그 사람이란 노래의 가사와 같이 

철학적으로는 헤겔 정신의 주체자로서의 사용되었던 사람들

헤겔이 정신으로 높였던 나폴레옹...



:"나는 사람이 아닙니다" 개그맨의 표현들이 한 때 유행어로

사람들이 즐거워했던 일들..

연예계에도 그런 사람이 있었네요^^


기억이 새롭군요..


복잡한 시간이 있어도 

이 글을 읽는 분도 웃음을 잊지 않고 생활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글을 써봅니다.**



비가 오면..

the man at that time.

"I'm not a man"

"maipies"..

"10 years ago"


2022년 1월 2일 일요일

읽는 설교(sermens wrtten)

일반적으로 설교에 대한 강의에서 다룰 수 있는 주제이지만

설교원고와 설교(preaching)의 관계는 

표현되어짐에 있어서 같이 하면서도 다를 수  있습니다.


한번씩 증거한 말씀으로서 설교원고를 통해서 은혜를 나눔에 있어서

말씀을 전하고 동시에 받는 설교자와 성도의 전체를 고려해야 합니다.

좀 자세한 교리적 언급이  필요할 수도 있고

공부가 필요한 것도 있다는 점을 감안해서 

읽으시고 은혜를 나누었으면 합니다.


설교문에 대한 평가를 의식하기보다는

설교원고를 읽는 시대에 있어서 

도움을 드리는 것이 좋다는 점에서 글을 남깁니다.


2021년 12월 25일 토요일

주님의 축복하심을 기억하며

 사랑하는 성도들 사랑하는 교회

 

사도 바울과 바나바가 심히 다투어 각기 길을 갔습니다.

누가 더 잘했는가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성경에서는 그것에 대하여서 직접적인 답변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바울 중심에서 바나바에 대한 존중과 관심 정도를 읽을 수 있습니다.

 

얼마 전 제가 사임한 교회의 사진을 보았습니다.

 

전과 다름없는 성도님들, 새로 보이는 성도님들을 보니

참 귀해 보이고 주께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안식년을 보내고, 이제 새롭게 주의 뜻을 받듦에

새롭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저는 바울도 바나바도 아니지만, 합당한 절차를 따라서

사임했습니다. 하지만, 어려움을 같이 못하는 가운데서의 불편함으로

서로 다툼은 아니라고 하여도 어려운 관계였습니다

 

한편으로는 떠나 온 교회에 대해 걱정이었는데,

또한 주님께서 새로운 성도도 보내주시고 새 역사를 시작하심에

감사와 찬양을 주님께 드립니다.

 

이제는 주님께 맡길 수 있어 기쁩니다.

 

 

저는 이제 본 사역을 시작하는 때입니다.

목회의 외연적 사역이라고 함에 있어서도

목사로서 참으로 해야 할 일입니다.

새로운 뜻하심을 따라 순종하려고 합니다.

 

 

성탄을 맞이하면서

주의 거룩하심 안에서

발견되기를 소망하면서

 

 

 

문자와 이미지를 생각할 때

 다른 카페에서 고민하는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저는 그런 생각은 하지 않지만 형편이라고 하는 것은 매반 일반입니다.

 

그 고민이란 것이 요즘은 구글 유튜브로 몰리는 경향이 있어 카페가 별로 인기가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것에 대해 인정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더 많은 호응을 얻을 것이라고 봅니다.

호응 뿐만 아니라 상당한 교류로 인해 많은 것을 얻을 수 있고 

또한 얻고 있습니다.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라고 봅니다.

 

 

뭐, 이런 글을 씀에 있어서 어쩜 '토라진 님'의 러브스토리를 의식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래전에 개인적으로 고민한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문자를 선택하느냐 아니면 이미지를 선택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의 '의식하는 것들'은 사실 이 문제와 연결되어진 것으로 봅니다.

 

문자도 사실 그림 문자로서 출발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컴퓨터에서의 이미지는 숫자로 표현되어진다는 것도 사뭇 흥미로운 것입니다.

 

숫자가 글자일까 아님 그림과 가까울까,

언어를 배울 때에 숫자를 같이 배우니 언어에 가깝지 않을까

 

역사의 기준도 언어의 발달에서 언급되기도 하는데

어떤 이미지를 위한 봉사적 개념에서 글자 즉 문자의 사용이 되어질 수 있다는 측면...

 

역사라는 측면을 전승사적 개념으로 본 판넨베르크의 사상적 입장과 같이 

판단하자는 뜻은 아니며, 또한 그 이미지적 개념을 구성적 개념의 어떤 산물이라는

종교적 개념으로 이미지를 말하자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여기에 대해 몰트만이 아주 잘 비판을 한 것을 기억합니다.

 

역사 가운데 문자와 이미지의 상관성, 현대신학에서의 잘못된 신의 개념을 인식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역시 이미지를 위한 이미지로서의 맹목성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미지의 이미지를 위한 개념이 사상적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과

미디어의 이미지적 개념이 거의 압도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거의 같은 길을 걷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으로 봅니다.

 

 

 

사람들의 인식과 매체에서의 문자와 이미지 그 선택적 의미를 어느쪽에 두느냐

현상적 현실에서는 이미 끝난 질문이지만, 

아직도 유효한 질문으로서 남아 있음을 봅니다.

 

 

아.. 이쯤하면 뭐 설형문자를 쓴 것이라고

비난하실 것 같습니다.^^

 

아마 로제타 비석이 발견되기까지 

이해하기 힘든 그림문자를 썼습니다.^^

 

 

 

아무튼 문자가 이미지에 대해 종속적 개념으로

마냥 구상적 노력을 하는 것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는 점도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 기본적인 상대적 이유로는 

전체의 여지로서 문자적 역할의 근본적 자리는 

분명히 있다는 것과

 

무엇보다도 문자에 대한 선택이라는, 그것을 주관하는

주체를 생각할 때에 결론적 입장을 취해 봅니다.




참고 댓글 보기

 

2014년 7월 7일 월요일

is He selfish?, No.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 자존의 하나님의 행하심에 대하여서 그 정당함과 본래성과 모든 속성들 절대성과 같은 것을 취하심에 대하여서 사람들은 오해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한마디로 기독교만 진리라고 하는 것은 이기적이다는 것입니다.

다원주의적 사회의 정황상 맞지 않다는 것과 어떤 객관적 근거지음이라는 지성의 행보라고 하는 것을 일방적으로 폄하할 수 있는가 자기만 옳다고 할 수 있는가 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상대적 다원성이라는 개념의 보편성도 절대적인 범주가 아니라는 사실, 그렇다면 그 보다 더 큰 범주적 개념에서 본다면 다원성적 재가를 받지 않는다는 측면 즉 상대적인 개념으로 비로소 해석되어지지 않는다고 비판이나 이어 비난으로 '이기적'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광대하심은 상대적 보편과 그에 따른 다원성이라는 개념보다도 더 크다는 사실에서 그러한 제한적다원성에서는 하나님을 판단할 수 없는 것입니다. 즉 '이기적이다'라는 언어적 묘사가 그 설득력과 정당성을 이미 잃어 버린 것이라는 것은 기억할 만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광대하심 하나님의 실존적 높으심은,-여기서 실존적이란 차용된 언어는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인격의 하나님이심을 기억하여 사용된 것입니다 - 우리가 인식하는 다원성의 보편성에 비로소 판단을 받지 않으시면서도 그 언어들을 재가하실 수 있습니다. 제한적인 언어로도 자신을 나타내시길 기뻐하실 때에 그것을 한정적 범주인 다원적 범주에서 비로소 규정되는 언어 '이기적(selfish)' 임의적으로 사용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광대하심에 대한 것을 잘 나타낸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이름 '스스로 존재하시는 자'입니다. 야훼 하나님, 물론 그 해석에 따른 여러 견해가 있습니다만. 납득 당위성을 스스로 가지고 있는 해석이 이 하나님의 이름 자존의 하나님이라는 해석임에 있어서 바르게 납득할 수 있는 이름의 증거입니다. 그리고 물론 다른 이름들도 이 해석적 관계에서 다시 재가되어질 수 있는 범위에서 해석해야 함이 옳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그 절대, 본질 본래, 기원 정당함 등등 모든 것을 스스로 취하심의 속성적 자기 계시를 말씀하심에 있어서는 상대적 범주들도 재가를 받아야 비로소 실재하는 것이지 논리적 앞섬이라는 개념으로 또는 제한된 보편성으로 하나님의 자기 계시로서의 하나님의 이름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이기적임, selfish?, 이것은 하나님께 적용되어질 수 없는, 판단할 수 있는 용어로 구별되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성의 정직함을 기억할 때에, 이런 언어는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말 조심하라는 것이 이런 의미에서 입니다.




is He selfish?
No, He is not!

2014년 6월 27일 금요일

뒷짐 지고 걸어봐.. 음 ^^ - just like a dove

길을 걷다보면 비둘기들이 종종 걸음질하는 것을 볼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사람들에 비교하면 뒷짐 지고 걷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그리고 웬만해서는 사람이 다가가도 여유?가 있는 모습 마치 고참들의 걸음걸이를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비둘기들도 학습이 된 것일까요.. 사람들이 걸어다니는 것을 하도 보다보니까.. 자기들도 사람인줄 아는 가 봅니다.^^ 꼭 사람 흉내 내는 것 같아요 비둘기의 걸음 모양이 말입니다.

이처럼 관찰이라는 개념에서 또한 분석이라는 개념에서 유사비교와 학습에 따른 종의 변화를 유추할 수 있는데, 아마도 자연선택이라는 점에서 비둘기도 아마 날지 못하고 인간처럼 걸어다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진화론에 대한 한소리를 하는 겁니다. 다윈이 켐브리지 대학 신학대학을 졸업했음에도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줄 알고 주목했으면 좋았을 것을, 다른 것을 주목하니.. 그 바라봄이라는 것이 납득을 강요하게 되었다고 봅니다.

갈라파고스, 거북이 보다는,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주님을 바라보았다면 좋았을 것을.. 그 당시의 신학적 배경과 합리성의 납득 당위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가운데서 다윈은 바라봄이라는 대상을 잘못 설정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도 생각해봅니다. 어쩌면 다윈도 피해자일 수 있겠네요.. 신학적 책임이라는 것을 기억할 때면 말입니다. 신학의 부재.. 임의적 신학의 범주의 제한적 입장, 그리고 중세의 신학과 영성의 이분화는 아직도 계속되어질 수 밖에 없는 현실의 이어짐.. 그런 점에서 다윈도 고통스러웠을 것 같습니다.

인간적 차원에서 다윈을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이해한다는 것과 용납은 또 다른 어떤 것이 될 수 있겠지요.. 현상이해라는 개념에서 실재적 분별력이 없는 상황에서는 비트겐슈타인도 자기 논리에 현혹당하는 것과 같이 현실적 실재에 그야 말로 필요이상의 당위성을 부여하는 실수를 범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현상학과 분석철학 이 모든 것들이 실재론에 대한 객관적 근거지음의 기준과 범주를 임의성에서 다루기 때문에 임의적 좌초에 부딪치고 있다고 봅니다.

다윈의 학설이라는 개념이 현상학적 실제라는 개념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면 비둘기 뒷짐 걸음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고 지나치게 주장할 수 있지 않을까요..

하나님께 사랑받는 성도들 비둘기처럼 순결한 재가가 있는 성도들, 현상학적인 개념의 목소리에 뒷짐지고 걸어볼까요.. ^^ 비둘기같이 여어쁜 자로 솔로몬의 사랑을 받았던 술람미와 같이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의 모습으로 그들의 눈을 열 수 있을 것만 같아요..^^













2014년 6월 17일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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