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6월 27일 금요일

뒷짐 지고 걸어봐.. 음 ^^ - just like a dove

길을 걷다보면 비둘기들이 종종 걸음질하는 것을 볼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사람들에 비교하면 뒷짐 지고 걷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그리고 웬만해서는 사람이 다가가도 여유?가 있는 모습 마치 고참들의 걸음걸이를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비둘기들도 학습이 된 것일까요.. 사람들이 걸어다니는 것을 하도 보다보니까.. 자기들도 사람인줄 아는 가 봅니다.^^ 꼭 사람 흉내 내는 것 같아요 비둘기의 걸음 모양이 말입니다.

이처럼 관찰이라는 개념에서 또한 분석이라는 개념에서 유사비교와 학습에 따른 종의 변화를 유추할 수 있는데, 아마도 자연선택이라는 점에서 비둘기도 아마 날지 못하고 인간처럼 걸어다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진화론에 대한 한소리를 하는 겁니다. 다윈이 켐브리지 대학 신학대학을 졸업했음에도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줄 알고 주목했으면 좋았을 것을, 다른 것을 주목하니.. 그 바라봄이라는 것이 납득을 강요하게 되었다고 봅니다.

갈라파고스, 거북이 보다는,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주님을 바라보았다면 좋았을 것을.. 그 당시의 신학적 배경과 합리성의 납득 당위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가운데서 다윈은 바라봄이라는 대상을 잘못 설정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도 생각해봅니다. 어쩌면 다윈도 피해자일 수 있겠네요.. 신학적 책임이라는 것을 기억할 때면 말입니다. 신학의 부재.. 임의적 신학의 범주의 제한적 입장, 그리고 중세의 신학과 영성의 이분화는 아직도 계속되어질 수 밖에 없는 현실의 이어짐.. 그런 점에서 다윈도 고통스러웠을 것 같습니다.

인간적 차원에서 다윈을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이해한다는 것과 용납은 또 다른 어떤 것이 될 수 있겠지요.. 현상이해라는 개념에서 실재적 분별력이 없는 상황에서는 비트겐슈타인도 자기 논리에 현혹당하는 것과 같이 현실적 실재에 그야 말로 필요이상의 당위성을 부여하는 실수를 범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현상학과 분석철학 이 모든 것들이 실재론에 대한 객관적 근거지음의 기준과 범주를 임의성에서 다루기 때문에 임의적 좌초에 부딪치고 있다고 봅니다.

다윈의 학설이라는 개념이 현상학적 실제라는 개념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면 비둘기 뒷짐 걸음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고 지나치게 주장할 수 있지 않을까요..

하나님께 사랑받는 성도들 비둘기처럼 순결한 재가가 있는 성도들, 현상학적인 개념의 목소리에 뒷짐지고 걸어볼까요.. ^^ 비둘기같이 여어쁜 자로 솔로몬의 사랑을 받았던 술람미와 같이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의 모습으로 그들의 눈을 열 수 있을 것만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