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7월 7일 월요일

is He selfish?, No.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 자존의 하나님의 행하심에 대하여서 그 정당함과 본래성과 모든 속성들 절대성과 같은 것을 취하심에 대하여서 사람들은 오해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한마디로 기독교만 진리라고 하는 것은 이기적이다는 것입니다.

다원주의적 사회의 정황상 맞지 않다는 것과 어떤 객관적 근거지음이라는 지성의 행보라고 하는 것을 일방적으로 폄하할 수 있는가 자기만 옳다고 할 수 있는가 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상대적 다원성이라는 개념의 보편성도 절대적인 범주가 아니라는 사실, 그렇다면 그 보다 더 큰 범주적 개념에서 본다면 다원성적 재가를 받지 않는다는 측면 즉 상대적인 개념으로 비로소 해석되어지지 않는다고 비판이나 이어 비난으로 '이기적'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광대하심은 상대적 보편과 그에 따른 다원성이라는 개념보다도 더 크다는 사실에서 그러한 제한적다원성에서는 하나님을 판단할 수 없는 것입니다. 즉 '이기적이다'라는 언어적 묘사가 그 설득력과 정당성을 이미 잃어 버린 것이라는 것은 기억할 만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광대하심 하나님의 실존적 높으심은,-여기서 실존적이란 차용된 언어는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인격의 하나님이심을 기억하여 사용된 것입니다 - 우리가 인식하는 다원성의 보편성에 비로소 판단을 받지 않으시면서도 그 언어들을 재가하실 수 있습니다. 제한적인 언어로도 자신을 나타내시길 기뻐하실 때에 그것을 한정적 범주인 다원적 범주에서 비로소 규정되는 언어 '이기적(selfish)' 임의적으로 사용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광대하심에 대한 것을 잘 나타낸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이름 '스스로 존재하시는 자'입니다. 야훼 하나님, 물론 그 해석에 따른 여러 견해가 있습니다만. 납득 당위성을 스스로 가지고 있는 해석이 이 하나님의 이름 자존의 하나님이라는 해석임에 있어서 바르게 납득할 수 있는 이름의 증거입니다. 그리고 물론 다른 이름들도 이 해석적 관계에서 다시 재가되어질 수 있는 범위에서 해석해야 함이 옳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그 절대, 본질 본래, 기원 정당함 등등 모든 것을 스스로 취하심의 속성적 자기 계시를 말씀하심에 있어서는 상대적 범주들도 재가를 받아야 비로소 실재하는 것이지 논리적 앞섬이라는 개념으로 또는 제한된 보편성으로 하나님의 자기 계시로서의 하나님의 이름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이기적임, selfish?, 이것은 하나님께 적용되어질 수 없는, 판단할 수 있는 용어로 구별되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성의 정직함을 기억할 때에, 이런 언어는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말 조심하라는 것이 이런 의미에서 입니다.




is He selfish?
No, He is not!

2014년 6월 27일 금요일

뒷짐 지고 걸어봐.. 음 ^^ - just like a dove

길을 걷다보면 비둘기들이 종종 걸음질하는 것을 볼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사람들에 비교하면 뒷짐 지고 걷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그리고 웬만해서는 사람이 다가가도 여유?가 있는 모습 마치 고참들의 걸음걸이를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비둘기들도 학습이 된 것일까요.. 사람들이 걸어다니는 것을 하도 보다보니까.. 자기들도 사람인줄 아는 가 봅니다.^^ 꼭 사람 흉내 내는 것 같아요 비둘기의 걸음 모양이 말입니다.

이처럼 관찰이라는 개념에서 또한 분석이라는 개념에서 유사비교와 학습에 따른 종의 변화를 유추할 수 있는데, 아마도 자연선택이라는 점에서 비둘기도 아마 날지 못하고 인간처럼 걸어다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진화론에 대한 한소리를 하는 겁니다. 다윈이 켐브리지 대학 신학대학을 졸업했음에도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줄 알고 주목했으면 좋았을 것을, 다른 것을 주목하니.. 그 바라봄이라는 것이 납득을 강요하게 되었다고 봅니다.

갈라파고스, 거북이 보다는,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주님을 바라보았다면 좋았을 것을.. 그 당시의 신학적 배경과 합리성의 납득 당위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가운데서 다윈은 바라봄이라는 대상을 잘못 설정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도 생각해봅니다. 어쩌면 다윈도 피해자일 수 있겠네요.. 신학적 책임이라는 것을 기억할 때면 말입니다. 신학의 부재.. 임의적 신학의 범주의 제한적 입장, 그리고 중세의 신학과 영성의 이분화는 아직도 계속되어질 수 밖에 없는 현실의 이어짐.. 그런 점에서 다윈도 고통스러웠을 것 같습니다.

인간적 차원에서 다윈을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이해한다는 것과 용납은 또 다른 어떤 것이 될 수 있겠지요.. 현상이해라는 개념에서 실재적 분별력이 없는 상황에서는 비트겐슈타인도 자기 논리에 현혹당하는 것과 같이 현실적 실재에 그야 말로 필요이상의 당위성을 부여하는 실수를 범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현상학과 분석철학 이 모든 것들이 실재론에 대한 객관적 근거지음의 기준과 범주를 임의성에서 다루기 때문에 임의적 좌초에 부딪치고 있다고 봅니다.

다윈의 학설이라는 개념이 현상학적 실제라는 개념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면 비둘기 뒷짐 걸음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고 지나치게 주장할 수 있지 않을까요..

하나님께 사랑받는 성도들 비둘기처럼 순결한 재가가 있는 성도들, 현상학적인 개념의 목소리에 뒷짐지고 걸어볼까요.. ^^ 비둘기같이 여어쁜 자로 솔로몬의 사랑을 받았던 술람미와 같이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의 모습으로 그들의 눈을 열 수 있을 것만 같아요..^^













2014년 6월 17일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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